김연아와 디자이너 이상봉의 만남Ice Princess
<VOGUE> 2010년 05월호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낳은 세계적 셀레브리티 김연아. 얼음판 위에서 나비 같은 손짓과 새처럼 유연한 동작을 선보이던 그녀가 디자이너 이상봉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김연아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프리 스케이팅을 마쳤을 때, 전 세계 방송 해설자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미국 NBC는 “제가 본 올림픽 프로그램 중에 가장 눈부신 작품입니다! 피겨 여왕이여, 영원하라!” 를 외쳤고, 일본 NHK는 ‘대단하다’와 ‘완벽하다’ 를 무한 반복했으며, 영국 BBC는 “이 젊은 숙녀에게선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행복해질 뿐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숨막히는 그녀의 기술과 더불어, 손짓과 어깨 움직임, 얼굴 표정까지 너무나 아름다웠고 완벽했다. 게다가 컨셉에 딱 어울리는 헤어, 메이크업 감각까지 돋보였음은 물론. 그녀의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더블 악셀이나 트리플 토룹, 트리플 러츠 등의 피겨 기술뿐 아니라 그녀의 스타일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당연한 결과다.
얼음판 위에서 아름다운 피겨 의상을 입었을 때는 물론, 나이키의 ‘N98 연아 골든 모먼트 재킷’을 입고 공항을 나설 때도, 혹은 광고 모델이기도 한 쿠아의 티셔츠에 하늘색 재킷을 걸치고 학교를 갈 때도 화제를 모았다. 특히 작년 ‘페스타 온 아이스’에서 입었던 이상봉의 의상은 아주 특별한 반응을 얻었고, 올해도 역시 갈라쇼에서 디자이너 이상봉의 의상을 입기로 결정했다. 지난 4월 9일, 이상봉의 아틀리에를 찾은 김연아는 하얀색 후드 티셔츠와 데님 스키니 팬츠를 입고 차분히 걸어 들어왔다. 하얀 플랫 슈즈를 신고 지도 프린트의 작은 하트 크로스백을 멘 그녀의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경쾌하게 찰랑였다. 4월 16일부터 18일,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 마련된 특설 아이스 링크에서 선보일 ‘페스타 온 아이스’ 갈라쇼 의상을 위해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대학 신입생처럼 풋풋해 보이다가도, 어딘지 모르게 성숙함이 느껴지는 김연아의 오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먼저 갈라쇼에 함께하는 선수들과 맞춰 입을 티셔츠와 셔츠, 그리고 포인트로 더할 스카프를 먼저 고르기로 했다.
김연아를 비롯해 참가 선수들의 이름이 하나씩 쓰여 있는 셔츠 가운데엔 ‘007 본드 걸’의 총 쏘는 포즈가 실루엣 일러스트로 들어가 있다. “〈007〉에서 영감을 받아 총알이 번져 나가는 듯한 이미지로 이름을 써넣었습니다.” 디자이너 이상봉과 함께 여러 개의 디자인을 체크하던 김연아는 셔츠를 직접 입어보기로 했다.
김연아가 피팅룸으로 들어간 사이 디자이너 이상봉은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에 대해 얘기를 들려줬다. “김연아 선수는 얼굴이 작고 윤곽이 아주 뚜렷해요.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이랄까요? 그동안 봐온 연예인이나 모델과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또 런웨이 모델들은 일반인과 다른 아주 특별한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지만, 김연아 선수는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아주 훌륭한 프로포션을 가지고 있죠.” 이내 김연아가 화이트 셔츠를 입고 나오자, 디자이너 이상봉은 셔츠 앞부분을 잡아 매듭을 지었다. “캐주얼하게 소매를 접어 올리고, 앞부분을 묶으면 자연스럽게 뒷부분도 이렇게 연출이 되죠. 어때요?” 김연아는 마음에 드는 듯 거울로 앞뒤를 비춰봤다. 작년 ‘페스타 온 아이스’ 갈라쇼에서도 선수들이 다같이 한글이 프린트된 이상봉의 티셔츠를 입고 나와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저는 핑크색 프린트가 마음에 들어요.” 이상봉이 준비한 두 가지 컬러의 셔츠를 입어본 김연아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줬다.
다음은 피겨 의상들을 입어볼 차례. 피겨 의상은 시각적으로 주목될 뿐 아니라 피겨 기술을 할 때도 안전하고 완벽해야 한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작년에 그녀와 작업하면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넓은 피겨 스케이트장을 가르는 한 명의 선수가 돋보이려면 화려한 장식이 필요하죠. 그리고 또 움직임이 워낙 커서 장식이 하나라도 떨어지면 위험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요.” 이상봉의 지난봄 컬렉션 컨셉을 토대로 만든 검정 의상은 얼핏 보면 배트맨을 연상시켰다. 소매와 연결된 판초 스타일의 독특한 의상을 입은 김연아는 피팅룸을 나오자마자 양 팔을 날개처럼 펴고 학 포즈를 취하며 귀엽게 웃었다. “이 위에 이번 컬렉션에서 선보인 갑옷 모티브의 어깨 장식을 더 해볼까 싶기도 한데, 어때요?” 이상봉이 직접 어깨 장식을 더하자 강렬한 이미지가 더해졌지만, 움직임이 좀 불편해 보였다. “그럼 대신 작은 가죽 패치로 시각적인 효과를 내야겠군요.” 김연아의 손짓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지켜보던 이상봉이 말했다. 위아래, 양 옆으로 팔을 움직여 보던 김연아는 양 옆으로 움직일 땐 불편하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디자인팀은 케이프의 뒷부분을 좀 짧게 하거나 혹은 가운데를 잘라서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로 결정했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컨셉이에요. 이 옷을 입고 얼음 위에 서면 색다른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다음은 봄꽃처럼 핑크에서 보라로 컬러가 자연스럽게 그러데이션 되는 의상. “봄꽃 같은 느낌이에요. 타이스 명상곡에 맞춰 연기할 때 입으면 좋을 듯해요.” 김연아는 경기 때처럼 머리를 손으로 말아 올려, 어떤 느낌이 나는지 거울에 비춰봤다. “치마엔 보석 장식을 더 화려하게 더할 예정입니다. 턴하는 느낌을 한번 볼까요?” 디자이너 이상봉의 말에 김연아가 자연스럽게 움직이자 진달래, 철쭉 등 봄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화사한 기운이 묻어났다. 이 옷을 입으면, 지난 동계 올림픽 갈라쇼에서 타이스 명상곡을 할 때 입었던 회색 의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날 것 같다. “소매 부분에 장식한 끈을 좀더 늘려야겠네요. 이런 끈 장식의 의상을 입어본 적 있어요?” 김연아는 “아뇨. 새로운 느낌이에요. 게다가 의상 실루엣도 마음에 들고요” 라고 답했다.
마지막 드레스 역시 이상봉의 F/W 컬렉션 의상을 응용한 룩이다. “앗, 전 여기에도 러플 장식이 있는 줄 알고 만져봤는데 프린트였네요.” 김연아는 트롱프뢰유 기법을 응용해 프린트를 더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손으로 만져보고, 거울에 비춰봤다. “하이넥 부분은 없어도 좋을 것 같아요.” 김연아의 말에 이상봉이 목 부분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말이죠? 수정해줄게요.”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컬러의 타이츠가 잘 어울릴지 대화를 나눴다. “여기에 검정 팔찌등 포인트가 될 만한 액세서리를 더한다면 또 다른 분위기가 더해질 거예요. 장갑을 껴도 좋겠고요.” 김연아는 어떤 프로그램에 어떤 의상을 입을지 고민에 빠졌다. “타이스 명상곡을 할 땐 보디 라인이 적당히 드러나는 옷이 좋은데 이 드레스는 러플 때문에 실루엣이 가려질 것 같아요. 두 번째 의상도 좋을 것 같은데요? 좀더 생각해보고 결정해야겠어요.” 오랜 경력의 선수답게 김연아는 의상을 입어보는 순간, 자신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체크하고 수정할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부드럽게 설명했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작년에 그녀가 아틀리에에서 피팅했던 의상이 완성되었음을 떠올렸다. 김연아는 블랙과 화이트가 어우러진 의상엔 한글 프린트가 들어가 있고, 가슴 부분에 스팽글 리본을 장식한 드레스를 다시 한번 입어보기로 했다. “딱 맞아요!” 김연아가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얘기했다. “이 리본은 너무 예쁘지만, 점프할 때 손을 가슴 쪽으로 모으기 때문에 좀 불편할지도 몰라요.” 디자이너 이상봉은 리본 부분을 떼고, 치마 부분이 펄럭이지 않도록 고정해주기로 했다. “그럼 스케이트를 신고 어떤 느낌인지 볼까요?” 빨간 알루미늄 트렁크에 고이 담아온 스케이트를 꺼내 신어보는 김연아. 플랫 슈즈를 벗고 스케이트 위에 올라서자 얼음을 우아하게 가르는 김연아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작년 ‘페스타 온 아이스’를 볼 때 주먹을 꼭 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어요. 의상의 작은 한 부분도 연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이상봉은 작년엔 평소 의상보다 약간 더 긴 기장으로 우아한 분위기를 더했고, 올해엔 좀더 현대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했다. “일 년 사이에 김연아 선수는 소녀 티를 벗고 숙녀가 되었더군요. 꿈을 이뤄서인지 훨씬 여유로워 보였고요. 그녀를 위한 의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그녀가 이상봉의 의상을 입고 얼음판 위에 서는 순간, 관객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파란 하늘 위를 유연하게 나는 새를 떠올리며 또 한번 감동을 받게 되지 않을까.
디자이너 이상봉이 만들어준 한글 프린트의 피겨 의상을 입은 김연아. 완벽한 비율의 그녀는 패션 모델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그녀를 위한 의상을 만든 이상봉은 그녀가 예쁜 소녀에서 아리따운 숙녀가 되었다고 감탄했다.